맷돌 독서모임

1 나는 죽을때 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이근후 전 이화여대 정신과 교수님 저)

유솔(柔率) 2015. 10. 15. 10:16


"나는 죽을때 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


이책을 접하고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에 많은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는 듯하다.

여기서는 이책을 재 인용하면서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보고 싶다.  수시 update



이 근후 교수님은 처음 책에서 접하는 분인데 

이화여대에서 정신과 의사로 50년 근무하신 이 분야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인 것 같다.

여든살이 되셨는데도 나이듬의 즐거움에 대하여 책을 내시면서 담담하게 자신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고 또 과거를 반추하면서 여러 지침을 주신다.


이분의 일상을 앞으로도 계속 소개하게 되겠지만


프롤로그에서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도 여전히 인생의 이런저런 불안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며,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하루에 지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나이가 듬으로써 생물학적 노화, 사회적 쇠퇴, 앞날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런걸 안고 매일 일어나지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에 긍정으로 받아 들이자 !!
중요한것은 재미있는 일을 택하여 하자는 것인데

이교수님은 젊어서 부터 늘 재미를 택하여 단련을 하셨다고 한다.


> 컴퓨터 가지고 노시는 것도 즐거움 이신 듯 합니다.(연세를 감안하면 컴퓨터에 능하신 분이 드물 듯)


러셀의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 재미의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고 하셨다

이분의 긍정 마인드를 5편에 나누어 다시한번 Review해 보는 시간을 갖고 이분 마인드에서 많은 것을 내것으로 하고 싶어요 !!!


이책이 2013년 출판되고 현재 제가 구입책이 71쇄 째이니 베스트 셀러네요 !!






Chapter 1  나는 죽을때 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뭐 그리 억울한가 !



> 나이들어 좋은점이 많다


  . 생활이 단순해 진다.

  . 책임도 의무도 줄어든다

  . 시간이 늘어나고 인내심이 많아지고

  . 감정이 섬세해 진다.


> 평소에 바쁘다고 못해본 일을 불어난 시간에 하나씩 해보는 재미를 누려보자

  . 여행을 하거나 

  . 글을 쓰거나

  . 악기를 배워봐도 좋으리라


> 누가 진도를 못나간다고 뭐라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줄 것이다.


요즘 아침 눈뜰때 마다 신기하다

주위에 밤에 자다가 세상을 떠난 동창, 선후배가 많은데...

나 또한 내일이 예약되어 있지 않은데

아침에 눈을 뜨면 ㅎㅎ  


와 ! 

눈떳구나 !! 

그 찰나의 신비감 !!!


나이 든다고 억울해 하지 말고, 나이 들었다고 후회하지 마라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할수 있는 만큼 했다.


지금 내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 더 급하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깨달은 것


어린시절 고등학교다니는게 어려운 정도까지 가세가 기울었는데 

그 어머님이 " 근후야 쌀이 없어도 쌀 뒤주는 보지 말거라 "


걱정만 해서는 해결될 일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 책 전체에 어머님의 영향력이 매우 컷음을 고백하고 계시네요 


그가 죽음의 위기를 넘긴 사례는 (그는 인연의 힘이 삶의 길로 가게 했다고 생각)


. 다섯살에 장티프스에 걸려서 죽다 살아났다

. 일제시대 가마가제 소년병에 한살차이로 징용에서 면하게 되다.

. 대학시절 독도행 배에서 사라호 태풍을 만났는데 위기를 면하게 되고

. 몇년전에 50% 확율의 심장혈관 수술에서 살아나게 된 일


언젠가 끝날 덤인생이지만 덤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살아있어 행복한 존재이다


 


왜 외롭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않는가 ?



추운 겨울에 연천에 있는 저자가 수십년째 해오던 네팔 의료봉사를 같이 했던 후배님을 찾아가기로 하는데


찾아 가보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드라 

  . 섬진강 주변 어디에 살때 한번 가보겠다고 하고 약속을 못지킨 사연이 있고

  . 연천인데 비무장지대 어디인데 너무 멀어보여서 또 못가게 될 사정이고 노인이라 못간다고 누가뭐라하지 않을 일이지만

  . 50년만의 추위에 주위에서 걱정도 하는데


  > 찾아 가보니 연천 비무장지대 바로앞인데

    . 금방 도착하드라(네비가 길을 알려줘)

    . 집에 가서 반갑게 맞이해 주는 그와 짬뽕을 맛있게 먹고, 

    . 화이트다방에 가서 모닝커피 한잔하고(모닝커피는 60년대 장인이 즐겨 마시던 것인데 그때 추억이 되살아 나고)

    . 즐거운 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너무 행복하다


오늘 하루 추위때문에 집안에 웅크리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 날이 되었을 것

마음 먹고 조금 움직여 그리운 사람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옛추억까지 더듬을 수 있었으니 참 값진 하루가 되었다


혼자기 때문에 외롭고 건강이 나빠지고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다.


외롭고 무섭다면 외롭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 노후대비 연금보다 외로움 대비책을 세워라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 궁금과 관심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 이 선생님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야금야금이다.


  . 나이 먹었다고 사람에게 대접받고 그가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란다면 점점더 외로워질 뿐이다.

  . 내가 다른사람에 관심을 갖어야 되는 것

  . 내가 먼저 연락하고 또 하나는 아무리 좋은 일도 야금야금 조금씩 해야 오래할 수있다.


이 짧은 글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찾아갈 사람이 많은가 ? 

그리운 사람이 있는가 ?  


어른이 된다는 것은

> 아기가 " 엄마 바쁘신데 젓은 나중에 주세요"  "배 고프지만 지금 엄마 바쁘시잖아요 "  이런 어린이는 없다

어른이 되어서 애들처럼 보채면 안되겠지요 ㅎ


> 어른이 되면서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 해결 방식을 더많이 다양하게 경험했는데

그 방법을 제처두고 불평, 불만, 무시, 외면 등 애들 방법을 쓰고 있지 않은지 한번 살펴봐라 !!!


힘든 것을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마라 !!!

이것은 나이든자의 자존심이다.




우리가족 3대에 거친 13명이 한집에서 



저자는 2남 2녀 이신데 장남의 아이디어로 장남이 자기 입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고, 육아문제도 해결되니 어떻겠느냐 제안


>가족 공동체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동의

  . 물리적인 독립이 필요하지만 

  . 저자는 부모와 장성한 자녀들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 각자 독립적인 인생을 살수 있겠다고 생각

  . 자식과의 소통도 생각


>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제3의 물결"미래사회에 대가족이 한지붕에 살게 된다고 예측

  . 정보화사회에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개인이 모여 사는 것이 효율적


> 간섭받기 싫어 하는 현대인의 강한 자아

  . 저자는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능력 부족이 더 원인으로 보는데

  . 이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2002년부터 대가족이 탄생


  . 상호 불간섭 주의

  . 독립성 보장           두가지만 저자는 강조



> 이들의 소통방식은


  . 사전 전화 등으로 허락을 받고 집에 방문

  . 개인사가 공동사에 우선

  . 이메일로 소통  (이 교수님은 휴대전화가 없어서 카톡이 안되요)

  . 손자 손녀의 교육에 관한 내용은 철저히 부모가 결정

    > 할머니할아버지는 충고가 필요할때만 나선다.



> 효과는 어떤가 ?



  . 지병이 많은 본인이 제일 수혜자라고 생각

  . 가족의 소통이 믿음과 존중으로 이루어져 단단한 가족이 됨


" 내집이 넓다고는 할수없다.  여분의 침실도 없으니까 !
하지만 내집이 좁다고 할수도 없다.  열식구가 충분히 편안하게 살수있으니까!!"





결혼해서 들어온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 부터 가르켜 



> 결혼후 새 식구에게 상하관계가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 소통을 지향


> 자신의 일방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

  . 정신과 의사로서 일요일 하루종일 집에서 녹음을 해보았더니 자신은 일방지시형

  . 자신이 언제나 옳지 않음을 인정

  . 평소처럼 행동하고 자식에게 하듯이 며느리를 대하게 됨


> 자신의 식사당번날 며느리가 도와주러 옴


  . 식사당번은 왜 정했냐 ?  도와주다 보면 계속해서 식사당번 해야된다.

  . 이후로는 며느리도 마음을 열고 불편하게 Yes를 하지 않는다.


> 거절을 많이 하는 좋은 며느리


  . 오늘 일산 차좀 태워다 줄수 있냐 ?

  .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어요 ㅎ

  . 그러면 택시타고 가면된다.


  >> 감정의 앙금이 생기지 않는다


> "삼대 다섯가구가 함께 모여사는 집" 취재를 나오게 됨


  . 아내와 손자손녀가 사진을 찍게 됨

  . 아들내외, 사위 등 어른들은 사진 안찍음( 못 찍겠다)

  . 알았다  

  . 폼나게 사진은 못 찍었지만 존중한다





당당하게 아파라 



> 저자는 왼쪽눈 실명, 당뇨, 고혈압,담석,통풍,디스크 등 7개 병과 살아가는 종합병원


  . 의사가 건강관리를 안하고 기름진 것 먹고, 운동도 안한 것 아니냐 ?

  . 억울하다.

  . 오히려 자기가 안고 살아가는 병은 너무 열심히 살아온 증거라는 게 본인의 소견이라고 !!


> 노화와 질병은 다른 것이다.


  . 시력 이상으로 찾은 병원에서 심장이상이 별견되어 두가지 수술을 받게 되는데 이때 한눈은 실명 

  . 한눈은 잃었지만 한눈이 있으니 고개를 조금더 돌리면 다 보이는데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나 ?

  

  " 어떤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내가 왜 이병을 얻게 되었나 ?,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했나 ?  운동을 더 했어야 되는건데 "

  이런 스트레스로 병이 더 깊어진다.


  . 이럴땐 우선 받아 들려라 


> 노화는 만성질환이니 받아들이고 긍정으로 대하라


  . 당뇨를 진단받고, 의사 지시대로 하고, 일상에 할일이 추가되어 혈당체크와 주사를 맞는다.

    >>  내 생명 연장을 위해 그정도 수고는 감내해야 된다고 본다


  . 나이들어 아프고 병이 생기는 것은 자연의 이치


>> 이분은 긍정적이셔서 병을 얻고 치유하는 과정도 즐기시는 듯 합니다.




70넘어서 공부도 재미있다




> 저자는 2011년 고려대 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합니다.

  . 최고령 졸업자 76세
  . 졸업식날 칭찬받은 고래처럼 춤추고 싶었다.

> 사람들의 생각은

  . 박사가 무슨 공부가 필요하냐?
  . 사람 기죽이냐 !  노욕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 누구는 2년 편입해서 2년에 끝내라   << 딱히 졸업장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서둘러 공부를 끝내란 말인가 ?
  . 받은 점수는 쓸데가 없으니 공부에만 집중
  . 요령피우지 않고 호기심에 따라 움직였다


> 은퇴하고 넉넉해진 시간이 쓸데없는 공부하기 딱 좋은 시기다.
  . 최근에 하는 쓸데없는 공부는 영화 공부

> 나는 어떠한가 ??
  . 사이버 대학 찾아보니 연 학비가 약 2백만원정도
  . 내가 현재 관심있는 사진에 대한 것은 잘 없다.
  . 방송통신대학은 학비가 30만원 정도인데 
  . 문화교양학과 정도면 지속적으로 인문학 분야와 이야기 할수 있어 약간 상식이 늘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잡학공부를 더 해서 치매 걸리지 말어야지 ㅎㅎ

 

무모하게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를 지원하게 됨


  . 왜 정신과냐 ? 주의의 핀잔을 들음

  . 4.19 주동자로 수감되어 사형수, 도둑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

  . 어떤 이는 작은 어려움에 분노를 표시하는데 어떤 사람은 사형을 앞두고도 편안한게 궁금 


> 국립정신병원장에게 편지를 써서 취직을 부탁


  . 외국 유학길도 막혔고, 전과자가 되어 취직도 만만치 않은 상황

  . 좋은 병원에 취직이 안되면 뛰어난 스승, 실력있는 선배의사와 교류가 안되는 상황이 됨

  . 원장이 자신을 받아줘서 근무하게 됨


> 국립병원은 혜택이 되었다

  . 좋은 스승과 많은 환자를 만나게됨

  . 국립병원으로 여러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기회가 많아서 좋은 선배들과 교류가 많아짐


> 정신과 의사로서 새로운 일을 많이 하게 됨


  . 폐쇄병동을 개방병동으로 바꾸는 일을 시도

  . 사이코드라마 치료법 도입

  . 한국정신치료학회 설립

  . 네팔의료봉사 


> 40여권의 정신의학 서적을 번역, 저술


  . 의학서가 원서 이외에는 부족한 시대

  . 짧은 영어실력으로 번역하자 유학파 은사가 오역을 발견하고 그만두라고 


> 선생님이 번역하실 생각이 없으면 저를 막지 마십시요 


  . 처음 번역서는 출판해 주는 출판사가 없어서 <<  이근후의 책을 내면 잘 팔릴 것이다 라는 소문을 스스로 내고 다님


> 하나 의학사의 사장이 찾아와 책을 내게 됨


  . 현재 500여권의 의학서적을 발간한 굴지의 출판사가 됨


> 젊어서는 무었이든 혼자 힘으로


  . 엎어져도 패기가 젊었을때는 있어야 된다

  . 위험을 피해가는 지혜는 나중에 나이 먹어서 깨달아도 됨



>>  노후엔 못해본 여행이나 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당신에게 한마다 한다면


    . 막연한 환상 보다는 시간을 마음 껏 쓰겠다고 생각하라 

    . 취미든 봉사든 돈벌이든 뭔가 하면서 사이사이 여행한다거나 손주 재롱을 보면 되는 거다


   . 저자는 상담, 네팔의료봉사, 보육원아이돌보기, 석불연구, 노인교육 등 여러 분야에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시네요  




내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



> 실수와 불행은 자기 능력보다 120% 해내려는데서 시작한다.  우리는 80%의 능력발휘를 목표로 세울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 120%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보다

  . 80% 이상 해 냈을때의 뿌듯함 그리고 이어지는 자신감이 더 필요하다



> 좌우명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저명 인사인 만큼)

  . 철학은 정장입은 상식이라는 말로 대신

  . 그래도 묻는 다면 차선으로 살아라


> 능력의 30%는 여유를 두었기에 가능하였다


  . 대학대 산악부를 만들고 1982년에는 히말라야도 등반함

  . 산이 정복의 대상이었지만 

  . 등산하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느낌

  . 이런 감수성은 보육원 봉사할때 "무하문화사랑방"을 열게 됨 (참고로 무하는 아호)


> 히말라야에 가면서 힐러리경을 만나서 1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 네팔의 어느도시 다리를 수리하고 있는 힐러리경에게서 봉사의 참뜻을 배우게 느끼게 되면서

   > 주머니의 100달러의 반 50달러를 기부함

   > 네팔 의료봉사가 시작됨



내 마음속에는 철들지 않은 소년이 살고있다



> 실용적이고 자유분방한 생각은 버리지 말자


  . 인생의 시기마다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성숙해 가는데 그렇다고 10대의 발랄함을 버릴 필요가 있나요

  . 마흔이 넘었다고 모범적인 아버지 모습만 보여줄 필요가 있나요

  . 노년이 되었다고 날마다 점잖은 얼굴을 하고 있을 필요가 있나요 ?


> 제자들의 회갑연을 선생님이 치러 준 적이 있다.

  . 살면서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ㅓ

  . 가끔 모두에게 행복함을 주는 느슨함은 꼭 필요하다.


> 나 스스로를 옭아 매는 일은 하지 않고 있나 ?


  . 자유로움은 구할때 까지가 어렵지 한번 실천하고 나면 무척쉽고 행복하고 시원하다.

  . 핑게대지 말고 실천해보고

  . 깨뜨려 보라

  .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다


> 본인도 스스로 옭아매고 안된다고 어렵다고 한 일이 많은데 해보니 별것 아니고 쉬운게 많다

  . 3년반전 시작한 등산은 이제 매니아가 되었는데  

  . 처음에는 어려워 보이고 매주 산을 찾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 앞으로는 더 많이 도전해 볼 용기가 생긴다.




[名士에게 듣는 山이야기] 정신과의사 이근후 박사

“산과의 교감 통해 주체성 확대해나갈 수 있습니다"

네팔은 등산가들에게나 여행가들에게나 인상 깊은 곳이다. 신령스럽기까지 한 고봉들이 즐비하게 솟아 있고, 상상도 할 수 없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네팔인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순수함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그래서 네팔을 찾았던 이들 대부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찾아가곤 하는 것이다. 

봉사로 일관된 삶 살아온 원로산악인

예년과 달리 마른 겨울이 지속되면서 등산인들이 그리워하던 흰 눈이 북한산을 하얗게 덮은 1월16일 오전, 이근후 박사는 맏딸 영주씨(가정의학 전문의), 둘째 딸의 맏아들인 최솔군(초교 5년)과 함께 북한산 구기동계곡으로 들어섰다. 구기동계곡은 일요일을 맞아 눈 구경 온 등산인들로 명절을 앞둔 시장통처럼 붐볐다. 

주치의나 다름없는 맏딸 영주씨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아버지가 미끄러운 바위를 디딜 때마다 “조심하세요”라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를 따라붙었다. 이 박사는 2003년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눈이 답답함을 느껴 귀국 후 병원을 찾았으나 눈 혈관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끝내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눈을 진찰하는 사이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서둘러 심근경색 수술을 해 위험한 상황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근후 박사는 얼음이 덮여 미끄러운 계곡길을 걸으면서도 편안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 산길 옆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게 가장 중요하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년을 맞아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태백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한강을 거쳐 서해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서해로 스며드는 상황에서 상류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저는 늘 지금 현재 상황이 내 인생에 황금기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가면서 즐겁게 사는 게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흰 눈 덮인 구기동계곡에서 맏딸 영주씨. 손자 솔군과 담소를 나누는 이근후 박사.
그는 보육원 원아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도 오랜 세월 노력해왔다. 1995년 회갑을 맞아 가족아카데미를 창립하고 20년 가까이 살아온 삼청동 집을 사무실로 쓰고 있는 것도 봉사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다. ‘건강한 가족, 건강한 사회’라는 기치를 걸고, 연구조사팀, 사이버교육?상담팀, 사회교육팀, 사회봉사팀, 멀티미디어팀 5개 위원회로 나뉘어 운영되는 가족아카데미에서 이 박사는 이사장, 200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서 정년퇴임한 아내 이동원 교수는 원장을 맡고, 결혼한 2남2녀 부부 모두 자기 분야에 맞는 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물론 많은 전문가들이 각 분야에서 봉사하고 있다.  

구기분소를 지나 승가사 갈림목 쉼터 의자에 앉자마자 이 박사는 “요즘은 꼭 필요한 기간 외에는 카트만두에 머물지 않지만, 처음 네팔을 방문했을 때는 가로등도 신호등도 없을 만큼 정말 지낼 만한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박사는 피란 시절 변완철, 배석규, 고한식씨 같은 한국산악회의 전설적인 산악인들에게 전문등반을 배울 기회도 가졌고, 경북대 의대 본과 1학년 때인 57년에는 경북학생학악연맹 창립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던 원로 산악인이다.

“6?25동란 막바지였던 중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힐라리라는 사람이 세계 최고봉을 올랐는데, 너희들도 그런 기개를 배워 꼭 세계 최고봉을 올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 분이 제게 산을 심어준 첫 어른이셨던 셈이죠. 

아무튼 제가 산에 다닐 때는 등산화는 영국 군화, 겨울 복장으로는 하얀 스키복을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골판지에 그려 만든 본을 대장간에 가져가 쇠를 달구고 두들겨 아이젠을 만들기도 했고요. 빨치산 아지트가 남아 있던 58년에는 군용트럭 타고 함양까지 간 다음 경찰들이 앞장서 눈길을 뚫어주는 가운데 지리산 적설기 산행도 했답니다.” 

흰 산에 꿈을 꾸어오던 그는 67년 연맹 창립 10주년을 맞아 히말라야 로체샤르(8,400m) 원정을 목표로 세우고 그에 앞서 일본 북알프스 동계원정까지 다녀왔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 승가사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석불문화연구회.
“로체샤르 원정 무산 이후 바삐 사느라 산을 접어두고 있었는데, 82년 마칼루 원정 참가 제의가 오지 뭐예요. 팀닥터를 맡으라면서 말입니다. 히말라야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지만 베이스캠프에 묶여 있다 올 것 같아 학술대원을 하겠다 했죠. 마침 문교부에서 예산을 지원하게 되어 있었기에 학술조사를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했으니까요. 그 때 한 6개월간 네팔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답니다. 쿰중의 힐라리병원도 방문하고, 루클라로 내려가던 중 만난 힐라리에게 마침 주머니에 있던 100달러 중 50달러를 병원을 유지하는 데 쓰라고 건네주기도 했고요.” 

당시 그의 가이드나 다름없는 셰르파는 그의 고향인 돌카 지역을 안내했다. 거기서 그는 흰 산만큼이나 맑은 영혼을 가진 네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대단한 병도 아닌데 약이 없어 치료하지 못하고 지내는 이들을 보곤 무척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귀국 후 한국간질협회(장미회)의 도움을 받아 84년부터 3년간 매년 1,000여 명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약품을 보냈다. 89년부터는 당시 몸을 담고 있던 이화여대 부속병원 의사와 이대생들로 구성된 이화의료봉사단을 결성해 매년 네팔을 방문해 치료도 해주고, 병원도 지어주었다. 이 박사는 의료봉사활동을 정년퇴임 이듬해인 2002년까지 해왔다. 

이 박사의 봉사정신은 단지 네팔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의 머리 속에는 남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병을 몸에 달고 사실 정도로 수시로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너무 아파하시기에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조수는 지금 의사가 없다며 왕진을 거부하지 뭡니까. 뻔히 있는 줄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병원 문을 나서면서 결심했죠. 꼭 의사가 되어 환자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 어디든 달려가겠다고.”

경북대 의대 입학으로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한 그는 이미 학창시절 산이 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팔공산 기슭에 병원을 지어놓고, 환자들과 팔공산 동봉을 오르내리면 특별한 약물의 도움 없이도 치료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요즘 그는, 1년에 두 차례 이상 입원하던 환자들을 가끔 만나 담소를 나누다 병원 부근의 삼청공원을 산책한 다음 점심을 먹는 것으로 치료를 끝내는데, “그 환자들은 입원하는 일이 없이 지낸다”고 말한다. 

원아 돌보기도 이미 어린 시절 마음먹은 것이다. 중학교 시절 피란 도중 혈혈단신이 된 광명보육원생들의 참담한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후 70년 군의관시절 근무지 가까이에 어린 시절 인연 맺은 광명보육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매주 토요일마다 보육원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지내왔다. 95년에는 가족아카데미 내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무하문화사랑방을 만들어 음악 미술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원생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보육원 내의 무하문화사랑방은 이 박사가 자비로 만든 공간이다.

결혼한 2남2녀 가족과 한 지붕 아래 살아

▲ 정년퇴임 후 공동대표로 가족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이근후-이동원씨 부부.
이 박사는 두 아들과 두 딸 내외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다. 이 날 동행한 맏딸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는 나이 드신 부모를 자식 모두의 힘으로 모시겠다는 맏아들의 의사에 다른 형제들이 따른 결과다. 이렇게 해서 2003년 새로 지은 구기동 집에 들어갈 때 가장 신경써서 장만한 게 대형 TV와 펜티엄급 컴퓨터였다고 한다. 

“자식들과 함께 살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철저하게 지킨답니다. 각자 살집은 각자 용도에 맞게 설계했고요. 단지 우리 부부에게 편한 게 있다면 밥은 큰아들집에서 해결할 수 있고, 토요일이면 네 집 중 한 집이 외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죠. 아파트 관리비 대신 부모 공양비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대형 TV는 내 발로 가지 못할 때 흔들의자에 앉아 옛날 모습을 찍어놓은 히말라야를 보려고 큰 맘 먹고 산 겁니다. 컴퓨터는 함께 사는 자식들의 아이들을 내 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고요. 오늘도 산행 마치고 PC방 가기로 약속하고 솔이를 데려왔답니다.” 

이 박사네 온 가족은 네팔 트레킹 경험이 있다. 솔이는 5살 때 랑탕 트레킹을 했다. 이 박사는 “어려서부터 하도 산에 데리고 다닌 탓인지 큰딸은 제주도에 한라산만 없다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할아버지, 얼마나 더 가야해요?” 
“저 모퉁이만 돌면 된다.” 

승가사 진입로로 올라서기 전 지루했던지 솔이가 할아버지에게 남은 거리를 물었다. 그러자 맏딸 영주씨는 “산사람 말은 절대 믿으면 안 된다”고 조카에게 충고해준다. 아버지 따라 다니면서 체득한 경험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승가사 샘에 도착하자 한국석불문화연구회 회원들이 한 명 한 명 올라왔다. 이 연구회는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석불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에 86년 만든 모임이다.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의학도로서 우리 민족의 정서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화, 벽화 등 어떤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까 고민했는데, ‘석수장이 마음’이란 말이 있듯이 석불은 만드는 사람 마음이 투사된 것이고, 또 서민적이라는 면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20여 년 동안 석불 600여 곳은 찾아다닌 것 같습니다.” 

오늘 승가사에서 답사할 석불은 고려 불상으로 추측되는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 대웅전까지 오르는 계단길도 만만찮지만,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이어지는 108계단은 급경사에 계단이 밑으로 쏠리고 간간이 얼음이 붙어 있어 위험했다. 그렇지만, 이 박사는 그 옛날 팔공산 바위를 오를 때의 자신감으로 뚜벅뚜벅 올랐다. 마애불 아래에 서자 뒤로 보현봉쪽이 바라보였다. 새파란 하늘에 흰 눈 인 바위들은 더욱 힘차게 빛났다. 그러자 이 박사는 넌지시 산 얘기를 꺼냈다. 

“산에서 겸허함을 배우는 이도 있지만, 오만해지는 이들도 있답니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랍니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어머니의 품에 잠시 안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산이 품어줘야 등정 또한 가능한 거죠. 산은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랍니다. 산에 와서 건강을 얻는 것은 부차적인 겁니다. 그 이전에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게 더 큰 겁니다.” 

이어 이 박사는 히말라야는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할 대상지라 강조했다. 

“히말라야는 알프스와 무엇보다 무게에서 다릅니다. 알프스는 작은 감동을 주지만, 히말라야는 나를 전체적으로 누르는 거인입니다. 그와 함께 맑은 영혼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영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제가 네팔만 다녀오면 병원 직원들이 눈이 맑아지고 생기가 돈다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히말라야는 생각하게 해주고, 결심하게 해줍니다. 때문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히말라야를 가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네팔을 후진국이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명 선진국입니다.” 

네팔 시를 번역해 시집 <새들의 노래>를 내기고 하고, 재작년 구기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자신의 집이었던 삼청동 가족아카데미의 한쪽 공간에 네팔문화를 소개하는 예티의 집을 마련하기도 했던 이근후 박사는 지난해 가을부터 한국-네팔 교류전을 열고 있다. 지난해 10월 네팔의 조주씨를 초청하여 첫번째 교류전을 연 바 있는 이근후 박사는 오는 2월 네팔 문화탐방 때 장무식 교수 도자기전을 열었고, 올 10월에는 네팔 화가를 초청해 두번째 교류전을 가질 계획이다. 

그에 앞서 네팔 화가들과의 오랜 교류를 통해 선물 받거나 구입한 작품들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가족아카데미 가까이 삼청동의 ‘서울서 두번째 잘하는 집’에서 매월 작가를 바꾸어가면서 15점씩 전시하고 있다(문의 아카데미아 네팔캠프팀 전화 02-732-8144).

“폐쇄적인 사람에게도 등산은 도움됩니다”

이근후 박사는 승가사 법당 아래 계단을 내려서려 하자 맏딸 영주씨가 팔짱을 낀다. 아버지가 미끄러질세라 염려스러워서다. 조심스럽게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서면서 이 박사는 사람과 산이 어떻게 밀접한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옛날 수도자들이 산으로 들어간 것은 마음을 담담하게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등산인 가운데는 호연지기 기질인 사람도 있고, 폐쇄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연을 즐기기 위해 산을 오르기도 하지만, 남들과 교류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산을 찾는 이들도 있는 거죠.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남과 더불어 생각하고 살아갈 줄 안다는 거겠죠. 나와 자연, 나와 우주 등 주체성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거죠. 물론 자아가 약해 폐쇄적이고, 남에게 상처받기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산에 다니는 게 좋습니다.” 

이 박사는 “그것조차 안 된다면 저와 같은 사람을 찾아와야 합니다“며 보현봉 능선을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글 한필석 기자
사진 정정현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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